전자음악에 관심이 많다면 '모듈러'라는 단어를 한 번쯤 접해 봤을 것이다. 마치 우주선의 기판 한 부분을 뜯어다 놓은 듯한 괴악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소리를 만들고 연주하는 데 쓰이는 일종의 악기다. 신디사이저의 부품 간 연결부를 밖으로 꺼내놓고 각 부분끼리 직접 케이블을 꽂아 연결할 수 있게 만든,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신디사이저라고 이해하면 쉽다. 사실 요즘 나오는 신스들은 대부분 오실레이터나 필터, 앰프 등이 전부 결합되어 있는 형태지만, Moog Model D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듈러가 신디사이저의 기본적인 형태였다.
2019~20년을 기점으로 붐이 일었다가 현재는 점점 시장이 축소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럼에도 신디사이저라는 분야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싶거나 신디사이저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싶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모듈러 신스에는 Eurorack, Serge, Buchla 등 여러 규격이 존재하지만 본 글에서는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유로랙 규격을 기준으로 설명한다. 기초적인 부분을 설명하는 글이지만 신디사이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용어 정리
모듈(Module): 유로랙 규격 안에서 생산된 기기를 총칭하는 단어다. 세로 길이는 정해져 있지만 가로 길이는 다양하게 나온다. 케이스에 장착하고 파워 라인을 연결해서 사용한다. VCA, VCF, VCO, Modulation, 이펙터 등등 수많은 종류가 있다. 위 사진의 케이스에는 총 29개의 모듈이 장착되어 있다. 케이블은 3.5mm 언밸런스 케이블을 사용하며, 모듈에 케이블을 꽂을 수 있는 입/출력단을 '패치 포인트'라고 한다.
hp: 가로 길이 단위. 위 사진의 Doepfer A-100 케이스는 한 줄에 84hp, 총 세 줄이니 252hp만큼의 모듈을 장착할 수 있다.
U: 세로 길이 단위. 유로랙에서는 1칸이 3U다. 위 사진에는 세 줄이 있으니 해당 케이스의 세로 길이는 9U가 된다.
CV: Control Voltage. 전압에 따라 특정한 값을 조절하는 전기 신호를 의미한다. -12~+12V의 전압 값을 가진다. DAW에서 오토메이션 라인을 그리듯이 모듈러에서는 CV를 조절해서 원하는 효과를 얻는다. (실제로 에이블톤에 오토메이션 라인을 유로랙 규격의 CV로 변환해 주는 기능이 있다.)
VCA: Voltage Controlled Amplifier. 전압으로 Gain 값을 조절 가능한 앰프. VCA 컴프레서의 VCA와 같은 의미지만 기능적으로는 다르다.
VCF: Voltage Controlled Filter. 전압으로 Cutoff Frequency 값을 조절 가능한 필터.
VCO: Voltage Controlled Oscillator. 전압으로 음정을 조절 가능한 오실레이터. 보통 V/oct라는 단위를 쓴다. 삼각파를 기반으로 파형을 생성하는 Triangle Core, 톱니파를 기반으로 파형을 생성하는 Sawtooth Core로 나뉜다.
LPG: Low-Pass Gate. Moog에 Ladder 필터가 있다면 Buchla 신디사이저에는 LPG가 있다. 일반적인 필터와 달리 Cutoff Frequency와 입력 신호의 세기가 같이 내려가는 것이 첫 번째, Opto 컴프레서처럼 빛을 감지하는 회로를 통해 출력 신호가 조절되는 폭을 제어한다는 것이 두 번째 특징이다.
V/oct: Volt Per Octave. 입력 전압이 1볼트 상승할 때 음정이 +1옥타브 상승함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VCO 모듈이 이 단위를 채택하고 있다. VCF나 Delay 모듈에서도 가끔 보인다.
V/Hz: Volt Per Hertz. 입력 전압이 1볼트 상승할 때 음정이 +nHz 상승함을 의미한다. Korg나 Yamaha 신디사이저에서 가끔 보이는 단위다. 대부분 n값을 조정할 수 있게 되어있다.
Attenuator/Attenuverter: CV 신호의 전압을 낮추는 기능. 값을 0%부터 100%까지 조절 가능하다면 Attenuator, -100%부터 +100%까지 조절 가능하다면 Attenuverter(Attenuator+Inverter)라고 부른다.
기본적인 팁
1. https://modulargrid.net/ 에서 미리 랙을 짜볼 수 있다. 웬만한 모듈은 다 있고 유로랙 이외의 규격도 지원한다.
2. 모듈마다 소요 전력량이 있다. 사용할 모듈들의 소요 전력량 합이 케이스에 달린 파워 레일의 최대 전력량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듈과 파워 레일의 전력량은 보통 메뉴얼이나 판매 페이지에 기재되어 있다.
3. 신호를 복사하고 싶을 때 Multi 기능 모듈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아래 사진처럼 생긴 케이블을 사용할 수도 있다. Stackable Patch Cable이라고 검색하면 나온다. 물론 전력 공급은 따로 안되기 때문에 신호의 크기는 절반으로 내려간다.
4. 일반적인 신디사이저의 형태에 패치 포인트를 만들어 놓아서 모듈러처럼 배선해서 쓸 수 있게 만든 신디사이저를 세미 모듈러 신디사이저라고 하는데, 모듈러 입문에 많이 추천된다. Korg MS-20이 유명한 세미 모듈러 신스 중 하나다.
5. 모듈을 배치할 때는 모듈의 기능과 사용 빈도를 고려하는 게 좋다. 예를 들어 터치 플레이트가 달렸다거나 하는 입력 모듈은 케이블이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구석으로 빼놓는다거나, 이펙터 모듈을 마지막에 사용할 테니 라인 아웃 모듈 옆에 배치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또 4hp 이하의 크기가 작은 모듈들을 한 군데에 몰려있게 배치하면 파워 케이블을 연결하기 힘들 것이다.
주의사항
직접 회로를 배선해서 쓰는 모듈러는 일반적인 신디사이저보다 전기를 다루는 것에 더 가깝기 때문에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 번째로 파워 케이블을 꽂을 때, 케이블의 빨간 선이 -12V 신호를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파워 레일의 소켓을 보면 -12V나 RED라고 표기된 부분이 있을 텐데, 여기에 케이블의 빨간 선이 가도록 꽂아야 한다는 말이다. 모듈의 경우도 마찬가지. 행여나 거꾸로 꽂게 되면 해당 모듈뿐만 아니라 파워 레일을 공유하는 모듈 전체가 고장 날 수도 있다.
두 번째로는 케이블을 꽂을 때의 주의점이다. 신호가 들어오는 소켓과 신호가 나가는 소켓을 각각 인풋과 아웃풋으로 구분하는데, 당연히 보통은 케이블 한쪽에는 인풋, 반대쪽은 아웃풋으로 연결해서 쓴다. 그런데 이때 케이블 양쪽을 아웃풋 소켓에 꽂는 것은 위험하다. 모듈에 프로텍트 기능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모듈이 고장 날 수 있다. (인풋을 인풋에 꽂는 건 괜찮다. 그럴 이유는 없지만.)
마지막으로 모듈러는 모듈을 케이스에 꽉 채워서 장착했다고 해도 사이사이에 틈이 있고, 특히 빈 부분이 있다면 회로가 거의 노출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신디사이저보다 습기에 훨씬 민감하다. 스피커나 헤드폰 같은 장비들 또한 습기에 민감한 편이기 때문에, 습도 관리는 반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러모로 귀찮은 점이 많지만 때로는 그런 점이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묘한 장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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